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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사진

[스크랩] 두견새 우는 청령포

두견새 우는 청령포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청령포

 

 

두견새 우는 청령포

 

                             원곡 / 심수경

                            작사 / 이만진
                            작곡 / 한복남
                                      1966년
 
왕관을 벗어 놓고 영월땅이 왠말이냐
두견새 벗을 삼아 슬픈 노래 부르며
한양천리 바라보며 원한으로 삼년세월
아 ~ 애달픈 어린임금 장릉에 잠들었네
 
두견새 구슬프게 지져귀는 청령포야
치솟는 기암절벽 구비치는 물결은
말해다오 그 옛날의 단종대왕 귀양살이
아 ~ 오백년 그 역사에 비각만 남아있네
 
 
동강물 맑은 곳에 비쳐주는 달을보고
님 가신 뒤를따라 꽃과같이 사라진
아름다운 궁녀들의 그 절개가 장하고나
아 ~ 낙화암 절벽에는 진달래 피고지네
 
 
원곡 / 심수경
 
 

노래 / 민승아 

 

 

 

      강원도 영월..

아름다운 고장.. 충절의 고장....

                        

슬픈 역사의 아픈 과거가 함께하는 고장...

      

세종 임금의 큰아들 문종이 병약하지 않고

건강해서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아들 단종이

어린 나이에 일찍 왕위에 오르지도 않고

안정된 정치에 기반이 흔들리지 않았을 터인데..

그만 삼촌 숙부인 세조에 의해 임금자리에서 쫒겨나고

한양서 멀리 유배를  떠나고 사약을 받고

죽어서도 시신이 영월 동강에 한동안 버려져 방치 되었다는 사실에

권력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인간이 사악해야 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종 임금 유배지 청령포를 안내하는 광장이네요..

 

 

세종 임금의 큰 손자 단종이

아버지 문종 이향이 아프고 병약하지만 않았어도 어땠을까..?

자꾸 생각 해보게 되는군요..

세종이 4 대 문종이 조선 제 5 대 단종임금이

제 6 대 이어서 수양대군의 세조가..

7 대 조선의 임금이었다는 사실..

 

1450년 2월 세종 임금이 돌아가시고

곧바로 큰아들 문종이 왕위를 이어 받았지만

약 2년 정도 왕위에 있었던 관계로

그의 어린아들 단종도 흔들리는 조정정치 현실에서 피해자가 되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찌할까요......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두렵고 무서운 나날들..

어떻게 이 위기를 헤치고 한양 서울로 돌아갈수 있을까..?

곰곰히 때를 기다렸을 단종

 

 

세종의 큰아들이 문종 둘째가

수양대군 셋째 아들이 안평대군이었으니

안평대군도 바로 위 형인 수양대군에게

척살당하고 말았으니 세조는 어떤 인물이었을지?

그의 무덤을 가 보았는데

사악했던 그 수양대군 세조 임금도 땅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결국은 땅속으로 갈걸 왜 그리했는지

무언으로 물어보고 또 물어 보았답니다..

단종이 이 강물을 건너가 절해 고도..

육지안 천연 감방.. 유배지에 다다르게 되겠네요..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릴 때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수양을 꾸짖고

얼굴에 침을 뱉고 사라졌는데 어떤 연유인지

금새 수양대군 세조의 아들이 죽고

세조도 심한 피부병에 걸려 고생 고생 했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네요.....

성질이 포악한 세조 수양대군은 단종의 생모이신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그 관을 바다에 쳐 넣으라 명하니.....

참으로 살벌했네요..  

 

사람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를수 있단 말인가..

강바람도 예사롭지 않았으며

무심히도 흘러가는 강물은

그옛날 그 옛물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여기 왔을

불쌍하고 가엾은 나이 어린 단종 임금을 바라 보았으리라..

강변에 무수한 돌 자갈밭을 걸어봐도 단종대왕 생각뿐이었네요..  

 

수시로 오가는 작은 나룻배를 타고서

유배지가 있는 강 저편으로 단종대왕의 발자취따라 가고 있네요..

 

단종대왕은 12 살 어린나이인 1452 년에 임금에 오르고

2년 후인 1454 년 1 살 많은 송현수의 따님이신 정순왕후와 결혼을 하지만

금새 이곳 영월로 유배오는 바람에

그때 헤어져 영영 죽어서 무덤까지도 함께하지 못하고

따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수 없네요..

눈물의 나날들.. 고통의 나날들.. 어찌 말로다 표현 할 수 있을까요..?

솔밭길 걸어 가노라니 통곡소리 울음소리 들리어 오는듯 하네요..  

 

솔나무 바람 한점에도 단종의 애환이 스며있는데..

삼촌 숙부인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

단종의 충신들을 죽이고 친동생 안평대군마져 가차없이 처단하니

피비린내 나는 사건에서 단종대왕이 얼마나 부들부들 떨었을런지.. 힘없는 단종이었네요..

설마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을 테니까요..  

 

솔밭길 청령포 걸어가고 있으면 또 떠오르는군요..

유배를 보내놓고 서울에 남겨진 그의 왕비 송씨는

궁궐에서 쫓겨나와 지금의 종로구 숭인동에 정업원에 거처 하면서

여승이 있는 청룡사에 평생을 여승이 되어 보내기로하는데.. .......

애 끓는 마음 절절합니다..  

 

유배지에 감금된 단종의 시녀들이 거처하던 초가집 한채에는 의복과 식사를 책임 졌을테고요..

 

단종임금이 머물렀던 청령포 유배지가 이처럼 기와집이었을까..?

의문이 아닐수 없네요..

어쩌면 초가집 초라한 한채가

시녀들이 머물렀던 초가집과 마주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되었습니다.... 

 

단종이 영월 유배지에서 사약 받고 죽은후

200 여년이 지난 후에야 숙종 임금의 배려로

단종 임금과 왕비 송씨로 복위되긴 했지만

그들의 한 많은 삶을 그 무엇으로도 보상 할수가 있을까요 !!..  

 

영월에 유배 중인 단종이 관풍헌 자규루에 올라 피를 토하며 다.

 

자규새에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시를 짓기를.... 

일자원금출제궁    (一自怨禽出帝宮)     원한맺힌 새 한마리가 궁중에서 나온 뒤

고신쌍영벽산중    (孤身雙影碧山中)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매인다..
가면야야면부가    (暇眠夜夜面無假)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궁한년년한불궁    (窮限年年恨不窮)     해가 지고 해가 떠도 한은 끝이 없구나..
성단효장잔월백    (聲斷曉墻殘月白)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담장에는 달빛만 희고

혈루춘곡락화홍    (血淚春谷落花紅)     피 눈물 나는 봄 골짜기에는 낙화만 붉구나..
천롱상미문애소    (天聾尙未聞哀訴)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가

하내수인이독총    (何奈愁人耳獨聰)     어쩌다 수심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지..  

 

나이 어린 단종을 임금에서 내치고

사약까지 먹인 삼촌 수양대군 세조가

저세상에서 어찌 아버지 세종을 쳐다 볼것이며 큰형 문종에겐 또 뭐라 말할것인가..?

 친동생 안평에게는 또 뭐라 말하리.. .....

조카 단종대왕을 어찌 만날수가 있을런지..

 

 

한양을 떠나 앞서 올린 자료 한강 광나루..

그 광나루에서 배를타고 떠나온지......

7 일만에 영월 유배지 청령포 이곳에 도착한 단종대왕이셨습니다..

 

청령포는 3 면이 강물로 막혀있고

뒤로는 절벽 바위산이니 천혜의 옴짝 달싹 못하는 유배지이었네요..

 

배를 이용하지 않으면 나올수 없고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음이니 유배지 이곳 청령포!.......

기나긴 밤 두견새가 밤새 처량히도 울었으며

풀벌레 소리, 바람소리 사나운 산짐승들 배고파 우는 소리.....

강물이 철썩철썩 휘감아 돌아 흘러가는 소리에 단종대왕은 감히 잠들지도 못하였네요....

 

 

      유배지 청령포에서 단종의 시 한수 읽어봅니다..

 

      천추무한원   (千 秋 無 恨 寃)       천추의 원한을 가슴에 깊이 품은채....

      적령황산리   (寂 寧 荒 山 裡)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일고혼   (萬 古 一 孤 魂)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메이는데..

      창송요구원   (蒼 松 繞 舊 園)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영수삼천노   (嶺 樹 三 千 老)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계류득석훤   (溪 流 得 石 喧)      시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심다호표   (山 深 多 虎 豹)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부석엄시문   (不 夕 掩 柴 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가운데 보여지는 큰 소나무가 600 여 년 된

단종의 슬픈 삶을 보았을 觀音松(볼 觀 소리音)이라는 군요..

 

 

 

      왕방연의 시한수가 또 눈물나게 합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데없어 냇가에 앉았는데..

     저 물도 내안같아서 울어 밤길 예놓다..

 

     이 소나무가 단종의 그 때를 보았고 단종이 나무 아래서 통곡하였답니다.

 

단종이 갈라진 소나무 사이에 걸터 앉아

은 생각을 하고 놀기도하고 그랬다전해 오네요..

     

단종의 죽음에 관하여....

옛 문헌 록들을 잠깐 들여다 다..

世祖實錄..세조실록에는 단종의 죽음이 자살로 기록되어 있구요..

당연히 그렇게 썼을테지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니까요..

"노산군(魯山君)이 스스로 목을 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  

 

 

병자록(丙子錄)에 단종 죽음은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네요..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금부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니와서 온 까닭을 물으니 금부도사가 대답을 못 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魯山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 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 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이었다.

통인(通引)이 미처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 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 할수 없었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아래 사진은 단종이 강 절벽 위에

멀리 한양을 바라 보면서 망향에 젖어 돌탑을 쌓았다는 망향탑이 애처로웠습니다..  

     

아성잡설 기록에는..

魯山이 害를 입자 命하여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 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갸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더 있었다.

아전(衙前)의 이름은 잊었으나 그 아전(衙前)이 집에

老母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칠한 棺이 있어서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 지냈는데, 

얼마 안되어 소릉(昭陵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가 파헤쳐지는  변이 있어

다시 파서 물에 던지라고  명령하였다....

아전은 차마 파지 못하고 파는 척하고 도로 묻었다.

넘실대며 흘러가는 강물은 무심히  오늘도 흐르고 있것마는... 

 

영남야어(嶺南野語) 기록으로는..

魯山이 항상 객사(客舍.. 관풍헌)에 있으므로 촌 백성들로써 고을에 가는 자가 누(樓)아래에 와서

뵈었는데 害를 당하던 날 저녁에 또 일이 있어 官에 들어가다가 길에서 만나니 노산이 백마를

타고, 동곡(東谷)으로 달려 올라가는지라 길가에 엎드려 알현하며 "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

물었더니........魯山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 태백산으로 놀러간다 "하였다.

백성이 절하며 보내고 官에 들어가니 벌써 害를 당하였다.

절벽 아래 저 강물 흐르고 또 흘러도 단종의 옛 눈물 지금 어디로 모두다 흘러갔는지.. ...

강물아 말좀 해 보려무나!....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옥거리(獄街)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棺)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衙前)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郡) 북쪽 5 리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 지냈다 한다. 이 때 엄흥도의 족당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니

엄흥도가 말하기를  "내가 옳은 일을 하고 害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

爲善被禍 吾所甘心 "고 하였다  

 

송와집기 (松窩雜記) 기록에서는.....

魯山이 영월에서 죽으매, 棺과 염습을 갖추지 못하고 거적으로 초빈을 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 와서 슬피 울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름을 통하고

구휼을 받은 정분이 있다" 하며,  며칠을 묵다가 하루 저녁에 시체를 지고 도망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 산골에서 태웠다 "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 江에 던졌다 " 하여, 지금의 무덤은 빈 탕이요

가묘(假墓)라 하니, 두 말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알수 없다.

점필재 (畢齋 .. 金宗直)의 글로 본다면 江에 던져졌다는 말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 중은 호승(胡僧) 양련(楊漣)의 무리로써, 들의 지휘를 받은 자가 아닌가.

영원히 恨이 그치랴.......魂이 지금도 떠돌아 다닐 것이니 참으로 슬프도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청령포)에 유배되었을 때, 엄흥도는 이 고을의 오장(戶長)이 었었다.

밤낮으로 단종의 거소인 청령포를 바라보며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 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에서 슬프고 애끓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 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단종은 울음을 멈추고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 곳 청령포에 유배된 후 밤마다 꿈 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옛 일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이 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 "하며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 후 엄흥도는 매일 밤 비비람을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 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단종은 청령포 어소(御所)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觀風軒)으로 침소를 옮기게 되었다.

객사 동쪽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구시(子規詩)를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죽으니. 그 시신은 동강물에 내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 (東江絶壁 ..후일 낙화암)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히였으니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엄흥도 호장(戶長)은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世祖의 지시를 두려워 한 군수가 거절하자,

엄흥도는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그 곳에서 대기하였다.

그리고 시신을 인양하여 아들 3 명과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知山)의 先山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말리는 아들들에게 엄흥도는 위선피화 오소감심 (爲善被禍 吾所甘心) ..

즉 나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노라.....하며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

단종이 이 바위 절벽에 앉아 많은 눈물을 흘렸던 노산대가 강 절벽 위에 이렇게 있네요..  

 

서울 노량진에 사육신 묘소는

단종의 복위를 몰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되었으니 .......

그게 바로 단종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 사건이 되는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 6 명.....

이들의 죽음도 원통하고 분하기는 매 한가지인 거죠...

노산대 강 바위 절벽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푸른 강물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이직의 시 한수 읽어봅니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을 이 너 뿐인가 하노라..

 

노산대에서 바라다 본 단종의 망향탑 쪽 강 절벽 산이 저기 보여지네요.. 

 

 

유응부.. .....단종복위 운동의 주모자는 성삼문과 박팽년이다...

나 유응부는 무인 출신으로 행동 책임자다...... 

세조..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

박팽년.. 明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자리에서 내가 칼 한자루로 족하를 죽이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간사한 놈(金質..밀고자)에게 고발 당하였으니.....

유응부는 다시 무슨 말을 하겠소 족하는 나를 빨리 죽이시오..

세조는 즉시 무사를 시켜 박팽년의 살가죽을 벗기고......다시 심문하였으나 

유응부는 끝까지 자복하지 않고 오히려 성삼문을 향하여 소리 지른다.

노산군 단종이 앉았던 자리에 소년이 뭔가를 느끼려는 듯!.....

똑같은 자세를 취해보고 있어 마음 아려옵니다..  

 

사람들이 서생(書生)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그렇구나..

지난 번 내가 칼을 사용하려 히였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요" 하더니,..... 오늘의 화를 자초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족하는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저 쓸모없는 선비(성삼문)에게 물어보라... 
世祖는 더욱 화가 나서 불에 달군 쇠를 가져와서 그의 배 밑을 지지게하니 ,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유응부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며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성삼문(成三門:매월당)함깨 단종 복위에 참여 하였던

김질의 밀고로 발각이 되문도 갖은 문초끝에 새남터에서 는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데.....

, 세 동생, 네 아들 모두 남은 가족도 없고

누구도 무서워 시체를 건드리지 못하다가 생육신 김시습이 노량진에 묻었다..  

 

성삼문이 처형장에 끌려가면서 남긴 절명시.....

 

       격고최인명   (擊鼓催人命)    처형장의 북소리는 생명을 재촉하고

       서풍일욕사   (西風日慾斜)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는구나

       황천무객점   (黃泉無客店)    황천가는 길에는 주점도 없다는데

       금야숙수가   (今夜宿誰家)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잠을 자볼까....  

 

       단종 복위 운동하다 숨져간 성삼문의 또다른 시가 절절합니다..

 

       식인지식의인의   (食人之食衣人衣)   님의 밥 님의 옷을 먹고 입으니

       소지평생막유위   (素地平生莫有違)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수가 있으랴

       일사고지충의재   (一死固知忠義在)   이 죽음이 충(忠)과 의(義)를 위함이기에

       현릉송백몽의의   (顯陵松栢夢依依)   현릉(文宗의 능) 푸른 송백 꿈에서도 못 잊으리..

 

 

       금부도사 왕방연 ..王邦衍이 단종에게 사약(賜藥)을 전하고,

       한양으로 돌아 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읊은 시조이다.

      

       千里遠遠道   (천리원원도)    천만리 머나먼 길에 

       美人別離秋   (미인별리추)    고운님 여의옵고 

       此心未所着   (차심미소착)    내 마음 둘 데 없어 

       下馬臨川流   (하마임천류)    냇가에 앉았으니

       川流亦如我   (천류역여아)    저 물도 내안 같아여

       鳴咽去不休   (명인거불휴)    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묘소 장릉에서 두손 모아 기도를 올렸습니다..

한참을 떠나오지 못하고 이곳에 서성이며 여기저기 둘러봅니다......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 갑니다.

 

왕릉을 지키는 문인석 무인석은 시커멓게 비바람에 단단히 지켜주고 있었고

 둘러쳐진 곡장에 혼유석 장명등도 바라보았습니다..  

 

편안히 잠드소서 가엾은 넋이여.. 영원토록 좋은 세상에서 영면하시옵소서..

불행했던 지난날의 모든 기억들 다 내려 놓으시고.. 부디부디.이나라 대한민국 보살펴 주시옵고..  

가난한자 병든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어루만져 주시옵고..

국운이 상승되는 이나라 되게하여 주셨으면 하고

마음속 기도를 하고서 무거운 발걸음 뒤로하고 저는 돌아갑니다.  

 

자주 들르지 못한다하여도 우리들 마음속에는 늘 님을 잊지않고 기억하려합니다..

편안히.. 편안히.. 영원토록 잠드시옵소서 !.....,,..


 

     충절의 고장....아름다운 강원도 영월....

 

 

단종은 문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권좌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위(上王位)에 있던 중

1456년(세조2년) 성삼문 등이 꾀한 상왕 복위 계획이 탄로나는 바람에

동년 6월 22일 노산군으로 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 당했다가,

1457년 10월 24일 17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당시 세조는 금부도사 왕방연을 시켜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게 한다.

왕방연이 감히 사약을 진어하지 못하고 오열하고 있을 때,

단종을 모시던 공생(향교의 심부름꾼)이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졸라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단종은 생전에는 매우 인자한 분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인지,그의 영혼은 천상으로 오르지 못하고

밤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낮에도 나타나곤 하였다.

단종이 죽은 뒤, 강원도 영월부사는 도임하기 바쁘게 연달아 죽었다.

일곱 사람이 도임 첫 날밤에 연거푸 시체가 되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영월은 흉읍이 되고 폐읍이 되다시피 했다.

그 무렵 어느 조관이 영월부사를 자원하여 내려왔다.
그는 그날 밤 관속들을 물리친 다음

관복을 갖추어 입고  동헌에 촛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혼자 앉았다.

삼경(밤 11시∼새벽 1시)쯤 되었을 때,

한 줄기 바람이 촛불을 꺼버릴 듯이 불어치더니

이윽고 벽제소리 요란히 일며 대문이 활짝 열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앉아 지켜보니 난데없는 소년 대왕이

곤룡포에 익선관의 차림으로 좌우에 액정 소속과 승사 각원을 거느리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윽고 소년왕은 대청 위로 올라와 전좌했다.
이 때 부사는 단종이 나타난 줄 깨닫고 황급히 뜰 아래로 내려가 부복하였다.

그러자 단종의 혼령이 부사를 향하여 말하였다.

 

“내가 통인 놈의 활시위에 목이 졸려 목숨을 거둔 단종이다.

내가 죽을 때 목을 올가 맨 그 활시위를 풀지 않고 함께 묻었으므로 목이 몹시 아프구나.

내 본관에게 그것을 말하고 그 줄을 좀 풀어 달래러 여러 번 왔었는데,

본관이란 자들이 모두 겁쟁이라 번번이 놀래어 죽어버렸다.

 

이제 너는 그렇지 않으니 매우 가상하구나. 내 목에 얽힌 그 활시위를 좀 풀어다오.”
그 말을 들은 신임 부사는 전신이 오들오들 떨리면서 소름이 끼쳤으나,

마음을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신이 전하의 분부를 어찌 소홀히 하오리까".

새삼 망극 애통 하옴을 이기지 못할 뿐이로소이다.

그러하오나 전하의 용체가 어디 계시온지 알지 못하오니, 어찌하면 좋사오리까?”
 
그러니까 단종의 혼령이 역력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네가 나의 시체 있는 곳을 알려거든 이 고을에 엄홍도란 사람을 불러다 물어 보아라.”


“분부대로 거행 하오리다.”

부사의 말이 떨어지자, 일진음풍이 또 일어나더니

홀연 단종의 혼령은 간 곳이 없고 동헌은 조용해졌다.

그 이튿날 새벽이었다.

또 신임 부사가 죽었으려니 믿었던 관속들은

동헌 앞에 모여 쑥덕거리며 서로 먼저 들어가라고 야단들이었다.

염습을 하러 온 것이었다.

이 때 부사는 웃음을 참고 영창을 드르륵 열어 제치며 호령했다.

“너희들 게서 무엇들 하고 있느냐 ?”

관속들은 황황히 들어와 놀라고 기뻐하는 빛을 감추지 못하면서

엎드려 죄를 청하는 것이었다.


“이 고을에 엄홍도란 사람이 있느냐?”

이 뜻밖의 질문에 모두들 의아하여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예, 이 고을 호장으로 엄홍도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계속하여 아뢰는 그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단종이 죽던 날,

 

너무도 비참한 나머지 그만 금부도사는

단종의 시체를 치울 것도 잊고 황황히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는 것이다.

 

단종의 시체는 그 뒤로도 며칠째 그대로 방안에 방치되어 있었고,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아무도 거두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영월에 엄홍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평소 의기가 있고 충실한 성품을 지니고 있던 그는

단종의 손위(遜位)를 매우 통탄해 하고 있던 중,

마침내 큰 변을 당하여 시체까지 버려진 채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집안 살림을 모두 팔아서 수의와 판재를 마련하였다.

 

그러자 그의 친척과 이웃들은 후환을 우려하여 굳이 만류하였으나,

그는 아들과 함께 밤을 타서 시체를 거두러 들어갔다.
 
부자가 협력하여 염습과 입관을 마친 다음, 근처의 양지바른 산기슭을 찾아 장사지냈다.

그리고 그들은 몸을 감추었는데, 세조도 구태여 그들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부사는 곧 엄홍도를 찾아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반가이 영접한 다음,

지난밤의 일이며 목에 활시위가 매어져 있을 것이니

그것을 풀어야 겠다는 말을 하고 곧 단종의 시신을 묻은 곳으로 가자고 하였다.
 
부사의 말을 듣고 엄홍도는 매우 신기하게 여기면서

부사와 관속들을 인도하여 시신을 묻은 곳으로 갔다.

땅을 파헤치고 관을 끌어내어 열고 보니,

매장된 지가 이미 오래이건만 용안의 혈색이 오히려 생시나 다름없었다.
 
목을 살펴보니 과연 활시위가 매인 채 있었다.

그들은 곧 그것을 풀고 다시 정중하게 염습 입관하여 묻고 나서,

봉분 앞에 제전을 차려 올렸다. 그리고 부사가 친히 축문을 지어 읽었다.

 

왕실의 맏아드님이요, 어린 인군이시로다.

사나운 운수를 만나, 궁벽한 고을로 내쳐지셨나니

한 조각 푸른 산에 만고의 원혼이 서렸도다.

부디, 가까이 강림 하시어 향기로운 잔을 드시옵소서.
그 후부터 해마다 이 글로 제문을 삼아 읽곤 하였다.

 

그 날 제전을 끝마치고 동헌으로 돌아온 부사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단종의 혼령이 나타났다.
“너희가 내 목을 풀어주어 이제는 참 시원하구나! 너희 둘의 은혜는 잊지 않으련다.”
이튿날 부사와 엄홍도가 서로 만나 꿈 얘기를 나눠보니 둘의 꿈이 똑같았다.

이후로 두 사람은 과연 단종의 성은을 입었음인지 일마다 뜻대로 되었다.

 

그 때의 부사가 바로 중종 조의 명신 박충원의 조부이다.
한편 유배된 단종에게 날마다 음식을 차려 바치던 차성복이란 농부가 있었다.

그는 읍내에 들어갔다가 단종이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하며,

필경 자기가 염습을 해야 할 줄로 믿고 집으로 내려와 준비를 하려했다.

 

그날 밤 꿈에 단종이 나타났다.
 
“내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저승으로 갔으나 혼신이 의탁할 곳이 없어

전날의 약속대로 너의 집으로 왔노라.

 

그런데 내 시신을 거둔 사람이 따로 있으니 너는 그만두어라.”
차성복은 놀라 깨어 일어나 슬피 울며 신위를 베풀고 상복을 입었다.

그리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

 

그 후부터 길흉간에 단종이 현몽하여 가르쳐 주었음으로 만사가 순조롭게 풀렸다.

후세에 문장과 덕망으로 일세를 울리던 차천로, 차운로 등이 그의 자손이다.

 

 

 

          배꽃 피고 두견이 슬피 우는 계절이면

                     시조 '다정가(多情歌)와 단종 애사가 …

 


                  배꽃 피고 두견이 슬피 우는 계절이면  시조 '다정가(多情歌)와 단종 애사가……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ㅣ야 알냐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 드러 하노라......

.

                  (풀이)

             

               배꽃이 피어있는 달밤, 은하수 흘러가는 삼경에

               한가닥 가지에 피어나는 봄뜻을 자규가 알겠는가마는

               정이 많음도 병으로 여겨 잠 못 들어 하노라

 

 

               주제 : 봄밤의 애상적인 정감

               

               한역  [해동 소악부]

 

 

              梨花月白三更天    (이화월백삼경)

              啼血聲聲怨杜鵑    (제혈성성원두견)

              ?覺多情原是病     (진각다정원시병) ?=人변+盡

              不關人事不成       (불관인사불성면)

               

이조년 (李兆年 1269∼1343 (원종 10∼충혜왕 복위 4)

고려 말기 문신.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본관은 경산(京山).

1294년(충렬왕 20)에는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를 거쳐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지합주사(知陜州事)·비서랑 등을 지냈다.

1306년 비서승으로 왕을 호종하여 중국 원(元)나라에 갔을 때,

충렬왕 후계자의 세력다툼에 말려들어 유배 당했다.

그 뒤 귀양에서 풀려나 13 년 동안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감찰장령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郎)을 거쳐 군부판서에 올랐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이듬해 정당문학에 이르렀고,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의 음탕함을 여러 번 간언했으나 듣지 않자 사직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성근익찬경절공신에 녹훈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성산후(星山侯)에 추증되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

 

자규루

 

 

端宗 哀史 (단종애사)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단종은

그 해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자.

 

소를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겼다.

 

동헌 동쪽에 있는 누각을 자규루(子規樓)하는데,

 

이 누각은 세종 때 영월 군수였던 신근권이 세워서 매죽루(梅竹樓)라고 했던 것을

 

단종이 이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운다" 는 두견새(杜鵑: 一名 子規)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하여 그 시를 자규시라 하고 이 누를 자규루라고 부른다

 

어느 달 밝은 가을 밤이었나 보다.

 

 

누대에 외로이 앉아 있으려니 무엇이 그리도 슬픈지

 

 

피 나게 우는 두견새 소리, 자신의 신세 같이 비참하고 처량하게 들린다고 읊고 있다.

 

 

子規詞 (자 규 사)  

 

 

月白夜蜀魂추   (월백야촉혼추)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含愁情依樓頭   (함수정의누두)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어라

 

爾啼悲我聞苦   (니제비아문고)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無爾聲無我愁   (무니성무아수)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寄語世苦榮人   (기어세고영인)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일으노니

 

愼莫登子規樓   (신막등자규루)   부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자 규 시(子規詩)

 

 

一自寃禽 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온 뒤로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 속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   (궁한연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소리 끊긴 새벽 묏 부리에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슬픈 이 하소연 어이 못 듣고

 

何乃愁人耳獨聽   (하내수인이독청)   어찌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듣는가

 

 

 

 

   

          子規(자규) - 촉나라 망제의 전설 (귀촉도, 망제혼, 소쩍새, 불여귀, 두견이)

 

촉(蜀:지금의 四川省) 나라에 이름이 두우(杜宇)요,

 

제호(帝號)를 망제 (望帝)라고 하는 왕이 있었다.

 

어느 해 말 망제가 문산(汶山)이라는 산 밑을 흐르는 강가에 와 보니,

 

물에 빠져 죽은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오더니 망제 앞에서 눈을 뜨고 살아났다.

 

망제는 이상히 생각하고 그를 데리고 돌아와 물으니

 

 "저는 형주(刑州) 땅에 사는 별령(鱉靈)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서 물에 빠져 죽었는데,

 

어떻게 해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것이다.

 

 

망제는 '이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하늘이 내게 어진 사람을 보내주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별령에게 집을 주고 장가를 들게 하고 그로 하여금 정승을 삼아 나라 일을 맡기었다.

 

망제는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약한 사람이었다.

 

이것을 본 별령은 은연중 불측한 마음을 품고 망제의 좌우에 있는

 

대신이며 하인까지 모두 매수하여 자기의 심복으로 만들고 정권을 휘둘렀다.

 

그때에 별령에게는 얼굴이 천하의 절색인 딸 하나가 있었는데, 별령은 이 딸을 망제에게 바쳤다.

 

망제는 크게 기뻐하여 나라일을 모두 장인인 별령에게 맡겨 버리고 밤낮 미인을 끼고 앉아

 

바깥일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이러는 중에 별령은 마음놓고 모든 공작을 다하여 여러 대신과

 

협력하여 망제를 국외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망제는 하루 아침에 나라를 빼았기고 쫓겨나와 그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서 두견이라는 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를 부르짖어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뒷사람들은 그를 원조(怨鳥)라고도 하고 두우(杜宇)라고도 하며,

 

귀촉도 (歸蜀途)혹은 망제혼(望帝魂)이라 하여 망제의 죽은 넋이 화해서 된 것이라고 하였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청령포

 

영월 장릉

 

      관광지라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그곳이 그 옛날에는

 

      어리신 단종임금께서 영월에 유배되어 궁벽한 깊은 산중에서 무서움과

 

      공포와 싸우면서 恨을 읊으신 애절한 詩를 읽으면서......

출처 : 거문골 민박
글쓴이 : 거문골아줌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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